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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 중앙일보 킴보 장학생 선발 안내

  미주 중앙일보와 해피빌리지가 킴보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2023년도 킴보 장학생을 선발한다. 제36회를 맞는 〈킴보 장학생〉 선발은 미주 한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 사업으로, 미국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올해도 콜로라도 주는 덴버 중앙일보 지사를 통해 5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총 1만달러가 지급될 예정이다.   ◆ 신청 자격 ·2023년 가을 대학 진학 예정자(12학년) 및 대학 재학생. ·단, 이전 킴보 장학금 수혜자와 대학원생은 제외. ◆ 제출 서류 ·소정 양식의 신청서 ·본인 소개 에세이(영문) ·성적증명서(Official) ·2022년 부모 세금 보고서   ·각종 수상증명 및 사회봉사 활동 내역 (근거자료 사본 첨부) ·추천서(교사, 성직자, 봉사기관 단체장 등) ·금년도 고교졸업 예정자는 College Admission Letter 단, 모든 서류는 마감일 이전까지 해당 지사에 도착해야 한다. ◆ 신청서: 해피빌리지(www.myhappyvillage.org)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 접수마감 : 2023년 6월 23일(금) ◆ 장학생 명단 발표   2023년 7월 21일(금)자 중앙일보 지면과 웹사이트 ◆주관:해피빌리지(Happyvillage)       ◆ 주최: Kimbo Foundation, 중앙일보 ◆신청 및 문의처 : 덴버 중앙일보, 주간포커스 / 303.751.2567 혹은 Koreadailydenver@gmail.com  김경진 기자중앙일보 장학생 장학생 선발 덴버 중앙일보 미주 중앙일보

2023-05-01

수학자 눈으로 본 미국생활의 해학

 통계학자 출신 문인 고대진(사진)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를 출간했다.   텍사스대학 통계학과 명예교수로 중앙일보 오피니언면 ‘이 아침에’ 필진으로도 활약한 고씨는 지난 연말 20여년간 미주의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에세이로 낸 것이다.     ‘좌충우돌 웃음 한 보따리, 유머, 해학 에세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수많은 사건을 수학자의 날카로운 눈으로 파헤쳤고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자로 입증된 글 솜씨로 매끄럽게 풀었다. 특히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읽을 수 있어 힐링이 된다.     제목으로 뽑은 ‘순대과 생맥주’는 2장 첫 에세이로 순대는 sundae 아이스크림을, 생맥주는 root beer를 말한다. 미국에 사는 한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문물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의 글에는 재미와 흥미를 끄는 소재가 넘쳐난다. 또한 시사적인 내용조차 ‘옳구나!’하고 무릎을 칠 수 있는 ‘나름’이 엿보인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공부 좀 했다 싶지만 막상 미국에 와서 안 들리고 말 못했던 영어에 대한 추억이 여기저기 에피소드에 담겨 있다. 독자는 누구나 ‘나만의 고충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도 매력이다. 총 66편의 수록돼 있다.   고씨는 제주 출신으로 오현고, 연세대, 워싱턴대를 나와 텍사스대(샌안토니오)에서 통계학 교수를 역임했다. 문인으로는 ‘미주 문학’으로 등단했고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단편소설), ‘창조문학’에서 시로 등단했으며 ‘무원문학상’ 수필본상, ‘시와 사람들’ 동인이며 미주 한국문인협회 이사다. 저서로는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6인 시집), ‘소올기’(시와 사람들 동인 문집)가 있다.     ▶문의: poet2.scientist1@gmail.com 장병희 기자미국 수학자 미주 한국문인협회 미주 중앙일보 순대과 생맥주

2022-02-16

[창간 40주년 - 중앙일보에 바란다]"한인사회 질적 성장 위해 고발기능 강화해달라"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보통사람 애환 담고 한인 정치지망생.단체장 등 심층취재 기대 저소득층.약자. 소수계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시 조례.소송 등 어려운 사안,알차게 보도를 남북 통일.1세 이민 역사 이야기 더 필요 좋은기사라도 오.탈자가 있으면 신뢰안가 LA중앙일보가 40번째 생일을 맞았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것에 미혹되지 않는' 불혹이다. 불혹을 맞기까지 중앙일보는 격려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독자들의 성원으로 성장했다. 지난 8일, 독자 3명을 만나 중앙일보에 바라는 점과 개선할 점을 함께 나눴다. 수십 년 신문을 읽어온 관록에서 나오는 지적은 날카로웠다. 이날 모임에서 중앙일보 독자위원회 소속 사이먼 양(작가), 이기원(리커스토어), 애나 이(부동산업)씨가 참석했고, 이원영 논설위원 겸 기획특집부장이 중앙일보를 대신해 대담을 나눴다. 정리= 구혜영 기자 -LA중앙일보가 마흔살이 됐다. 사이먼 양(이하 양): "우선, 중앙일보의 40주년을 축하한다. LA한인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언론으로서 의식 있고, 책임감 있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 거두절미하고, 우리 커뮤니티는 지난 40년 동안 크게 성장했지만 아직도 문제가 많다. 일부 한인 단체들은 요즘 법정싸움이니 알력 다툼이니 정신이 없다. 교회들도 말들이 많다. 한인사회에 공동체 정신이 사라졌다. 이 부분에서 신문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썩어있는 문제를 과감하게 시정하기보다는 시끄럽지 않게 넘어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이원영 부국장(이하 중앙): "신문의 지향에 대한 이야기 같다. 기자들끼리도 자주 하는 말인데 신문은 정보·계몽·재미 등 여러 가치를 추구한다. 중앙일보는 커뮤니티와 동반자 입장에서 함께 성장했다. 커뮤니티 신문이라는 것에 충실하기 위해 정보제공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사회악을 고발하는 언론의 기능은 물론 중요하다. 이제는 LA한인사회도 성장했고, 질적인 도약을 이루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에 맞춰 언론이 추구하는 가치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양: "요즘 JTBC의 손석희 앵커를 보며, 희망을 보고 있다. 낮은 시청률로 시작해 지금은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가 됐다. 이것은 손 앵커가 참다운 언론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의 한 일간지는 1년간 음주 폭행 실태를 파헤치는 시리즈를 게재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LA한인타운도 고쳐야 할 문제가 많이 있다. 신문이 사회 개선에 앞장서야 한다." 중앙: "동감한다. 그동안 앞으로 심층 기획취재 등을 통해 커뮤니티의 부정적인 모습을 개선하고 사회를 더욱 밝고 건전하게 만드는 데 신문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신문에 아쉬웠던 점은. 이기원(이하 이): "신문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것에 있다. 사실 정부나 시 조례, 소송 등 어려운 사안들은 특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른다. 예를 들어, 신문을 보면 '사우스LA의 리커스토어에서 한인 종업원이 권총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등과 같은 사건 기사가 많다. 이런 기사에는 대체로 용의자가 체포됐는지, 보석금은 얼마 냈는지 등에 관한 후속기사가 따른다. 그러나 그 사망한 종업원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그 가게는 어떻게 되는지 등이 궁금하다. 각종 법안과 행정처리 단계, 혜택 등에 대한 정보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애나 이(이하 애나): "아무리 좋은 기사라도 오·탈자가 많으면 마이너스다. 그동안 여러번 불만 제기도 하고, 신문을 오려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80% 정도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걸러지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오탈자가 있으면 신뢰가 안 간다." 애나: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가 교정까지 책임지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미국에선 신문이 한인 2세들의 한국어 교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바른 교육을 위해서라도 전문 교정이 꼭 필요하다."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읽고 싶은가. 이: "우리들의 이야기, 이민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땀, 눈물, 웃음을 보고 싶다. 우리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려주면 좋겠다. 독자 기고란 확대를 건의한다." 애나: "지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나 남북 통일, 1세 이민 역사 이야기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이건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다. 일흔을 넘은 한인 1세들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등 20세기 역사의 굵직굵직한 고개를 모두 넘어선 증인들이다. 중앙일보는 이들이 몸으로 견뎌낸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것도 역사다." 양: "한인 정치 지망생이나 선거구 재조정 문제, 한인 단체장 비리 심층취재 기사를 보고 싶다. 우리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려면 정치력 신장이 우선이다. 신문이 적극적으로 한인 정치인들을 밀고,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 일부 한인 단체장들이 이름값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깊숙이 비리를 파헤쳐 주길 바란다." -기사 외에 중앙일보에 궁금한 거 없나. 양: "JTBC 아메리카는 언제 오나?" 중앙: "준비중이다. 경쟁력 있는 한국 JTBC 콘텐츠에 미주에서 자체제작한 뉴스를 합쳐 '야무진' 방송을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현재 중앙일보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TV가 JTBC 아메리카를 위한 하나의 단계다." 애나: "기자들의 취재가 궁금하다. 어떻게 특정 시기에 맞춰 기사를 준비하는지, 기사는 어떤 식으로 선정되는지 알고 싶다." 중앙: "많은 취재와 회의의 집합체가 신문이다. 중요한 기사의 경우 취재 과정을 기사에 소개하는 등 독자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것도 좋은 방안인 것 같다." -다른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양: "중앙일보는 LA한인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신문이다. 단체들의 입장을 대신 말해주는 신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살아있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 특히 저소득층과 약자, 소수계의 말에 귀 기울여주길 부탁한다." 애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길 바란다. 신문의 생명은 진실이다." 이: "문제를 던져만 놓고 끝나는 기사 말고, 손에 잡히는 유용한 신문을 만들어달라." 정리=구혜영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중앙일보와 한인사회 40년]"때론 친구,때론 심부름꾼--이민사회 정보창구로"

미주 중앙일보의 40년 역사는 곧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미국사회-한인사회-한국사회를 이어주는 브리지로서 중앙일보는 한인사회의 나침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창간 다음해인 1975년부터 30년 이상 일선 기자와 논설실장, 편집국장을 역임한 홍석인 전 국장과, 역시 80년대 초반부터 현재(논설고문)까지 같은 길을 걸어온 박용필 전 국장을 후배 기자(이경민·오수연 기자)들이 만났다. 한인사회 현장을 지켰던 원로 기자들의 말을 통해 중앙일보와 한인사회의 동반자 역사를 되새겨본다. -과거의 중앙일보 기사는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주로 어떤 것들이었는지 들려주세요 홍: 당시엔 워낙 커뮤니티가 작다 보니 한인과 관련된 뉴스는 무엇이든 실었다. 한인 변호사가 탄생했다거나 정부 기관에서 일을 하게 됐다거나 하는 뉴스도 비중있게 다뤘다. 80~90년도에는 가슴 아픈 험악한 사건도 참 많았다. 장모를 야구 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 부유한 동네에 살던 아들이 누나가 일하러 나간 사이 부모님을 모두 살해한 사건 등 끔찍한 뉴스를 많이 다루게 되던 시절이었다. 리커 스토어 강도 사건이 한달에도 몇건씩 일어나곤 했다. 당시엔 커뮤니티와 신문이 워낙 밀착돼 있다 보니 중앙일보에 나간 강도 기사 때문에 매물로 내놓은 리커스토어가 안 팔린다며 편집국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업주도 있었다. 마사지팔러에서 일하던 아내를 쏜 살인미수범이 도주길에 신문사에 전화를 해 직접 제보를 한 적도 있다. 덕분에 기자가 검찰의 요청으로 직접 법정에 증인 출석을 하기도 했었다. 박: "80년대엔 한국 민주화 운동에 관한 기사도 많이 실었다. 당시 한국에선 사회 분위기상 보도가 자세히 되지 못했지만 오히려 미국에선 LA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할것 없이 그 내용을 비중있게 보도했고 AP 등 뉴스 통신에서도 한국 민주화 투쟁의 처절한 현장을 담은 사진이 쏟아져 나왔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몸을 피하고 있으면서 테드 커플과 같은 유명 앵커들과 직접 인터뷰도 했었다. 그만큼 우리 신문에서도 쓸 수 있는 내용이 많았고, 한국에서보단 자유롭게 이에 관한 보도를 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해오면서 중앙일보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요. 홍: 오랜 세월 한인 커뮤니티는 가장 정확한 정보를 신문에 의지해왔다. '중앙일보에 이렇게 나왔다'는 게 모든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시켜주는 척도였을 정도다. 때문에 이민생활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오류없는 정보를 전해줘야 한다는 게 지난 세월 모든 중앙일보 기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이 아니었나 싶다. 이민사회의 발달과 함께 한인 커뮤니티의 관심사도 바뀌어갔고 중앙일보 역시 그 흐름을 발빠르게 감지해 새로운 지면을 신설하며 독자들의 욕구에 부응해왔다. 자녀교육에 대한 한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교육 관련 기사의 비중을 늘렸고 커뮤니티의 경제력이 커지면서는 부동산에 대한 정보를 많이 다룬 식이었다. 여가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는 레저나 문화, 공연에 대한 기사를 늘렸고 이민 1세대들의 고령화 트렌드에 맞게 건강 정보에도 신경을 써왔다. 박: 지난 40여년간 미주 중앙일보의 제일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한인들에게 '미국'에 대해 알려주는 창구로서의 기능이었다. 사실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미국 뉴스는 '외신'이 아니라 '내신'이다. 그만큼 뉴스의 비중도 크단 뜻이다. 게다가 언어 장벽에 있는 한인들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 혹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중앙일보의 미국 뉴스, 세계 뉴스 지면밖에는 없던 시절이 있었다. 오피니언 란의 '윌셔 플레이스'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윌셔 플레이스' 칼럼을 통해 독자들에게 미국의 역사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주고자 아이들의 교과서를 보며 함께 공부를 했던 적도 있다. 칼럼을 통해 미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는 감사 인사를 받으면 그래서 더욱 뿌듯하고 보람됐다. -중앙일보가 한인 커뮤니티를 대변하면서 주류사회에 위상을 높여온 측면도 있겠습니다. 홍: 주류사회에서 하는 다양한 캠페인에 앞장서며 한인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어 나갈 수 있는데 큰 몫을 해왔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예를 들어 미국 암 학회(American Cancer Society)가 CBS, NBC, ABC 등 주요 방송사와만 파트너십을 맺어 진행하던 암 예방 캠페인에 중앙일보가 합류해 캠페인의 메시지를 한인사회에 널리 알리고 코리아타운과 주류사회가 더욱 가까워질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힘썼던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암 학회에서 중앙일보의 노고를 치하하며 소수계 언론기관을 대표해 표창까지 한 바 있다. 박: 해피빌리지의 전신인 미주한인봉사단(KAVC)을 창립하고 한인들을 봉사활동의 장으로 불러 모아 한층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도 중앙일보의 뜻깊은 업적이다. LA폭동 10주년에 중앙일보가 앞장서 흑인 커뮤니티와 함께 사랑의 콘서트를 개최해 모든 주류 언론이 취재를 왔던 일이나 한인 2세들을 모아 저소득층 흑인, 히스패닉 커뮤니티를 찾아가 학생들을 무료로 과외지도 할 수 있게 주선했던 일 등도 기억에 남는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스테이플스 센터 응원전을 주도하며 한인 커뮤니티의 파워를 주류사회에 알린 것도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중앙일보의 역할에 대해 조언해달라. 홍: 중앙일보는 지난 40년간 한결같이 이민사회의 민원창구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모든 한인들의 친구요, 심부름꾼이 돼야 할 것이다. 독자 전화 한통도 소홀히 받지 않고, 그들의 궁금증과 요구에도 늘 친절하게 정성껏 응대할 수 있는 중앙일보가 되길 바란다. 박: 중앙일보가 해 나가야할 앞으로의 40년의 역할은 지난 40년 동안의 역할과 똑같으리라 본다. 아무리 신문의 위기를 논하고, 한국어 신문을 보는 한인 사회 인구가 줄어든다고는 하나 신규 이민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 중앙일보를 찾는 이들 또한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중앙일보는 그런 의미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가이드가 되는 신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진행=오수연·정리=이경민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 40년]20여개 한인 업소가 5000여개로 250배 껑충

강산이 4번 바뀐 세월. 미주 중앙일보가 이민 사회와 함께 성장해온 시간이다. 지난 40년전 북가주 한인들의 생활상은 어땠는지,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지역 올드 타이머들의 회고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SF지역사업회가 펴낸 ‘샌프란시스코 한인 이민 100년’, SF한인센터의 ‘샌프란시스코 히스토리’ 등 자료를 통해 짚어봤다. “7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지역 거리에 중국, 일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한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어요. 어쩌다 한인과 마주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했지요.” 1971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와 뿌리를 내린 이돈응 전 SF한인회장의 회고다. 자료에 따르면 1973년 북가주 한인사회의 중심이었던 샌프란시스코 한인 인구는 2900명. 당시 산호세, 이스트베이, 새크라멘토와 몬트레이까지 합쳐 1만명 남짓한 한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는 1970년에 비해 3년만에 두배로 증가한 수치로, 새 이민법에 따라 70년대 중반부터 한인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센서스 집계에 따르면 북가주 한인 수는 80년대 3만여명으로 급성장 했고 실리콘밸리의 호황과 더불어 유입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90년대 5만여명, 2000년대 7만을 거쳐 2010년대 8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현재는 유학생, 지상사 근무자, 단기 체류자 등을 합쳐 1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지역 최초의 한인 여행사를 열고 현재까지 여행업을 하고 있는 이 전회장은 1974년도의 한국 왕복 항공료를 ‘620달러’로 정확하게 기억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도쿄를 경유해 한국으로 가는 노스웨스트 항공이었다. 당시 개솔린값이 갤런당 60여센트, SF의 2베드룸 렌트비가 300달러대, 주택값이 평균 2만5000달러 하던 시절이니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고객 대부분은 미군과 결혼한 군인 가족, 유학생, 미국 기업 근무자 등이었고 한달 평균 50장의 항공권이 팔렸다고 했다. 40년이 지난 현재,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UA·싱가폴항공 등 4개 항공사를 통해 하루 평균 1000여명의 한인들이 한국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나는 수치다. 40년전 샌프란시스코지역의 한인 식당은 ‘고려정’이 유일했고 한인 운영 업소는 소규모 그로서리나 잡화점 등 20여개가 전부였다. 한인 교회도 9개로 집계돼 있다. 2014년 중앙 한인 업소록에 등재된 한인 업소는 총 3500여개, 교회 수도 330여개에 이른다. 타민족을 상대로 하는 업소까지 포함하면 5000여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항공·군수산업체 로키드마틴에 근무한 남편 정기환씨를 따라 73년부터 서니베일에 거주하고 있는 정나미씨는 “당시 산호세지역은 온통 과수원 뿐이었다”며 “한식이 먹고 싶어 샌프란시스코까지 나가 중국·일본 마켓에서 장을 봐다가 김치를 담가먹고는 했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주변에 사는 한인이 없어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 전 교인인 20여명의 한인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덧붙엿다. 한인들이 많지 않아 외롭고 힘들기도 했지만 반대로 주류사회의 한인들에 대한 시각을 의식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76년 이민와 쿠퍼티노 고등학교에 다닌 김한일 치과병원 원장은 “당시 2000여명의 재학생중 한인은 나까지 2명뿐이었다”며 “이민 초기에는 덩치 큰 백인 학생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태권도 등 운동만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다 어느날 다른 한인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괜히 창피하기도 하고, 아버지(고 김진덕 전 미주 호남향우회장)는 내 뒷바라지를 위해 이민까지 와서 엄청 고생 하시는데,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같은 한인인데 하늘과 땅 차이로 비교되는게 싫어서’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달렸다. 결국 두사람 모두 치과 의사가 됐다. 70년대 중반 이민 물결을 타고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지역으로 몰려 들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새로 정착한 한인들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주유소 캐시어, 미국 식당 버스보이, 접시닦이, 청소 등 허드렛 일을 주로 했다. 그나마도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이같은 수요에 힘입어 1974년, 김관희 현 SF노인회장 등 당시의 한인사회 리더들이 주축이 돼 초기 이민자들에게 영어와 직업 교육을 시키는 상항 인력 개발원(현 SF한인센터)이 설립되기도 했다. 1기생 15명을 뽑는데 104명이 지원,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직업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기록에 따르면 첫 해 60명이 교육을 받고 미국 회사 등지에 취직했으며 그 숫자는 점점 늘어 90년대 초에는 한해 900명에 육박하기도 했다. 올드타이머들은 한인사회에 갖가지 단체들이 생겨나고 구색을 갖추며 성장해 온데는 70년대초부터 시작된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 한인 언론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입을 모은다. 언론을 통해 고국의 소식을 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인사회 돌아가는 일들을 접하며 각종 단체, 학교 동창회, 향우회 등이 결성돼 한인들이 결집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현재 북가주에는 각 지역 한인회에서부터 각종 동우회, 친목회에 이르기까지 300여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최광민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뉴저지 한인사회 40년]저지시티, 70년 중반 '의료 이민' 확대… 한인 몰려

1883년 한복차림 11명 미국 이민 첫발 2000년대 정치력 성장…현재 시의원 8명 1883년 9월 17일. 미국을 찾은 최초의 조선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뉴저지 땅을 밟았다. 뉴욕 맨해튼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뉴저지주 저지시티로 향한 것. 당시 뉴욕시의 관문이었던 저지시티의 페리를 타기 위해 한복 차림의 11명이 저지시티의 센트럴 철도 종착역에서 내려 첫 발을 디뎠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종사관 서광범은 뉴저지 한인사의 시작점이 됐다. 1886년 뉴저지 주립 럿거스대에 입학하며 뉴저지주에 거주한 최초의 한인이 된 것. 서광범에서 시작된 뉴저지주의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인 1970년대부터다. ◆70년대 초기 한인사회 중심 저지시티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뉴저지 한인사회의 중심은 저지시티였다. 1970년 중반 의료진 이민문호가 확대되면서 한인들이 저지시티로 대거 유입됐다. 대부분 저지시티 메디컬센터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와 그 가족들이었다. 고려대와 이화여대 출신 간호사들이 특히 많았다. 1980년에 이르러 저지시티에 사는 한인은 800명으로 늘어났으며 저널스퀘어와 버겐애브뉴 인근에 몰려 살았다. 타 지역에 비해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은 편이었다. 저지시티는 뉴저지 한인사회의 시발점과 같은 곳이다. 1971년 버겐애브뉴에 최윤교씨가 운영하는 '제일식품'이 첫 문을 열었다. 뉴저지 최초 한인교회인 뉴저지제일한인교회(초대 담임목사 박재영)도 같은 해 설립됐다. 1975년 뉴저지한인회(초대회장 김상진)가 저지시티에서 출범했다. 뉴저지 최초의 한식당인 금학식당도 1981년 저지시티 웨스트사이드애브뉴에 문을 열었다. ◆80~90년대 북부 뉴저지 발전 1980년대에는 한국계 지상사 주재원들이 뉴욕 플러싱에서 북부 뉴저지로 이주하면서 한국계 대기업의 뉴저지 진출도 가속화됐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식당 등이 북부 뉴저지 포트리와 팰리세이즈파크(팰팍)에 자리잡았다. 특히 뉴저지 최대 한인 밀집지역으로 성장한 팰팍의 경우 1980년대 한미수퍼마켓이 한인 업소로는 처음 문을 열었고, 이후 한식당 금호, 그랜드가구점 등이 자리 잡았다. 본격적으로 한인 상권이 들어선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이다. 한인 상권 발달은 1990년대 들어 교육환경이 우수한 북부 뉴저지 버겐카운티로 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된 것과 맞물려 있다. 포트리와 팰팍을 시작으로 테너플라이•잉글우드클립스•클로스터 등지로 유입되는 한인이 급속히 늘었으며 일부는 중부 뉴저지 에디슨 지역으로 이주했다. 에디슨 지역은 럿거스대와 연구소 등이 있어 유학생 커뮤니티가 일찍부터 자리잡았다. 또 한국계 대기업의 뉴저지 진출이 늘면서 주재원들의 뉴저지 이주도 증가했다. 90년대 들어서자 미주법인들 사이에 사옥과 사택 구입 열기가 몰아치기도 했다. 1970년대 뉴저지 거주 한인은 1만 명 정도였다. 지금처럼 북부 지역에 밀집해 있지 않고 저지시티와 뉴브런스윅, 남부 뉴저지 체리힐•트렌턴 등 뉴저지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2010년 센서스에 따르면 뉴저지주의 한인 인구는 10만334명으로 집계 됐다. 30년 사이에 10배 증가한 셈이다. 1990년 센서스에서 한인은 뉴저지주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했지만 2010년 1.1%로 늘었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북부 뉴저지 버겐카운티의 경우 전체 인구 가운데 한인은 1990년 1.9%에서 6.3%로 최다 소수 민족으로 발전했다. ◆2000년대 이후 한인 정치력 신장 한인 인구 팽창과 함께 2000년대부터 한인 정치력이 크게 신장됐다. 2004년 팰리세이즈파크 시의원에 당선, 미 동부지역 최초의 한인 시의원으로 기록된 제이슨 김 팰팍 부시장을 시작으로 이달 11일 포트리 시의원에 임명된 피터 서 의원까지 현재 뉴저지주의 한인 시의원은 총 8명으로 늘었다. 각 지역의 교육 정책을 결정하는 교육위원에도 팰팍•포트리•에지워터 등지에서 총 13명의 한인이 활동하고 있다. 또 뉴저지주에서는 2005년 최준희씨가 에디슨 시장에 당선되면서 하와이를 제외한 미 본토에서 최초로 직선제 한인 시장을 배출한 지역이 됐다. 최 전 시장은 2009년 재선에는 아쉽게 실패했으며, 현재는 연방하원의원 출마를 고려 중인 상태다. 2013년에는 뉴저지 한인사회의 시작이자 뉴저지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저지시티에서 윤여태씨가 시의원에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윤 의원이 당선된 D선거구는 총 2만 여명의 유권자 가운데 한인은 단 6명에 불과, '0.03%의 기적'을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1년 저지시티에 정착한 그는 허드슨실업인협회장, 저지시티 발전위원회 이사장, 저지시티 부시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당선의 요인이 됐다. 올 본선거에는 33세의 젊은 한인 2세 로이 조가 미 동부 최초이자 한인으로는 두 번째 연방하원의원 당선에 도전한다. 민주당 후보로 뉴저지 5선거구에 출마한 로이 조는 6선 관록의 스콧 가렛(공화) 현 의원과 맞붙여 힘겨운 싸움이 예상되지만, 역사상 5선거구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로는 가장 많은 80만 달러 이상의 후원금을 확보하는 등 만만치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민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한인들의 후원도 기적을 연출할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평가다. 정치력 신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슈 등 한인사회 주요 현안을 정치권에 강하게 요구하는 원동력이 됐다. 2010년 전세계 최초로 팰팍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버겐카운티 법원 앞, 올해는 유니온시티에 기림비가 잇따라 건립됐다. 또 2013년 뉴저지주 상•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뉴저지주는 인권 보호의 차원의 위안부 문제 알리기가 미 전역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 꼽힌다. 서한서 기자 hseo@koreadaily.com

2014-09-22

[창간 40주년 - 시애틀 한인사회 40년]검사부터 상원의원까지…한인사회 정치력 신장 텃밭

워싱턴주 한인사회의 가장 큰 자랑은 한인 정치인들이 미주의 그 어느 곳보다 많이 배출 되었다는 것이다.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의 도화선은 2세 마사 최(Marth Choe)부터다. 마사는 연세대학교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최계순씨와 정영자씨의 1남1녀 중 막내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UW에서 인종학을 전공한 후 시애틀대학에서 MBA를 받았고 오리건 유진에 있는 고교에서 4년여 동안 영어와 웅변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은행에서 11년 간 근무하면서 부사장까지 승진했는데 시애틀 아시안 사회와 미 주류사회에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91년 11월 시의원에 첫 출마, 미국 한인 이민사상 최초로 대도시 시의원이 됐다. 99년에는 워싱턴주 경제개발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마사는 2004년부터 시애틀에 본부가 있는 '빌& 메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글로벌 도서관' 프로그램 디렉터에 이어 수석행정관(CAO)으로 10년동안 근무하다 지난 8월로 은퇴했다. 마사의 영향으로 서북미 한인사회는 한인 1세인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임용근 오리건주 상원의원, 박영민 페더럴웨이 시의원 그리고 1.5세인 이승영 쇼어라인 시의원, 장태수 쇼어라인 시의원. 신디류 쇼어라인 시의원이 잇달아 탄생하는 등 한인사회 정치력이 미국 그 어느 곳보다 급신장 되었다. 이중에서도 임용근 오리건주 상원의원과 함께 상,하원 5선 최장 공동기록을 가지고 있는 신호범(79)박사는 1992년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당선됐으며 1998년 상원으로 선출된 후 상원 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성공적인 정치생활을 해왔다. 특히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1세 정치인으로서 미주 한인들 뿐만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1935년 경기도 파주시 금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으나 6살때 가출, 그때부터 서울역 앞에서 거지소년으로 방황하는 상상할 수 없는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미군 하우스보이가 되었는데 미군 장교에게 입양되어 18세에 미국으로 왔다. 독학으로 피나는 공부를 한 끝에 UW에서 동양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메릴랜드대학, 하와이대학과 쇼어라인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31년간 교수 생활을 하다 97년 은퇴하였다. 1992년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출마 당선되었다. 박영민씨는 이민 1세로서 페더럴웨이시 첫 한인 시의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첫 한인시장까지 역임했다. 1.5세 이승영(Cheryl Lee)씨는 1995년에 27세의 젊은 나이에 쇼어라인시 초대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최연소 아시안계 정치인 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9세 때 가족과 함께 이민 온 후 쇼어라인에서 고교를 나왔고 UW에서 기계 공학 전공, MBA 석사를 했으며 보잉에서 시니어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이승영 시의원이 2001년 3선에 재출마를 하지 않아 포지션 1번이 공석이 되자 이 자리에 1.5세인 장태수씨가 출마, 당선되어 시애틀 한인타운인 쇼어라인시에 두번째 한인시의원이 탄생되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인 71년에 시애틀로 이민온 그는 UW에서 경영학과 국제무역을 전공했다. 그러나 재선에 실패한 후에는 정계를 떠나 현재 모텔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장태수 쇼어라인 시의원이 재선에 실패했을 때 같은 쇼어라인시에서 1.5세인 신디류씨가 당선되었다. 2년 전 첫 출마에 실패했던 신디류는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 끝내 당선의 기쁨을 안았다. 한국말도 유창한 그녀는 1980년 UW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으며 83년에 UW에서 MBA 학위를 취득하고 남편과 함께 보험업을 했다. 특히 신디류의원은 2008년 쇼어라인 시에서 워싱턴주 최초의 한인 여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9년 재선에서 실패하자 2010년에는 워싱턴주 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녀는 올해 3선에 출마했는데 도전자가 없어 이미 당선이 확정된 상태이다. 이처럼 워싱턴주 한인사회에서는 지난 20여년동안 여러 한인 정치인들이 배출되었으나 이제는 올해 신호범 상원의원마저 은퇴하는 바람에 신디류 하원의원만이 유일한 정치인으로 남았다. 이처럼 이제 이민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워싱턴주 한인사회에도 1세 정치인들의 시대가 끝나고 이젠 1.5세 시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이젠 정치인 대신 1.5세 와 2세 한인들이 각계각층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판사 3명, 첫 한인 경찰국장, 시애틀 부시장 등 각계각층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고 있어 자랑을 주고 있다. 첫 한인 여성판사인 마리앤 스피어맨(지명희) 판사는 1984년 UW 법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변호사로서 활약하다 1994년 판사로 지명되었고 그후 선거에 당선되어 지금까지 연임하고 있다. 남편 마이클 스피어맨씨도 워싱턴주 항소법원 판사이기 때문에 판사부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어 지난 2013년 12월 제이 인슬리 워싱턴주지사가 한인 2세인 존 전(John H. Chun, 전형승 )변호사를 킹 카운티 수피리어 코트 판사에 임명, 두번째 한인 판사가 배출되었다. 그는 1960년 포트랜드로 이민 온 전홍국(전 오리건 한인회장)씨의 아들이다. 3번째로 시애틀의 정상기(Sam Chung) 변호사가 지난 5월 제이 인슬리 워싱턴주지사에 의해 킹카운티 수피리어 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올해에는 미국 본토 한인사회에서 처음으로 한인 경찰국장이 페더럴웨이에서 탄생했다. 주인공은 페더럴웨이 경찰국 앤디 황(48)으로 150여명의 경관들을 지휘해 인구 9만여명인 페더럴웨이의 치안을 맡게 되었다. 특히 올해에는 1.5세 여성인 김혜옥씨가 시애틀 부시장에 임명되었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에 임명되었던 그녀는 지난해 당선된 에드 머레이 시애틀 시장이 두명의 부시장중 한명으로 임명했다. 워싱턴주 최초 한인은 1898년 골드러시 때 시애틀에 홍지인씨 첫 발 워싱턴주에 최초로 한국인이 들어온 것은 언제였을까?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1890년대 말부터 1898년 서북미에 온 첫 한인으로는 홍지인씨로 알려져 있다. 홍씨는 1903-1905년 구 한국에서 7226명의 노동 이민이 정식으로 하와이에 이주하기 5,6년 전인 1898년에 이미 시애틀 항을 통해 미국에 온 후 당시의 골드러시로 알래스카에 갔다. 그곳 스카지웨이에서 금광을 탐색하러 다니는 사람들의 짐을 등에 지고 운반해주는 힘든 노동을 2년 동안 하다가 케치칸으로 가서 자영사업을 시작,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을에서 부유층에 속할 정도로 자수성가를 했다. 또 1890년말-1900년대 초 한인 인삼장사들이 이곳과 알래스카 등을 거쳐 간 흔적이 있고 그 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들 중 미대륙으로 와서 알라스카의 금광 및 수산, 통조림공장 등을 떠돌아다니며 일했던 한인들의 일부가 시애틀을 기지로 하여 산 흔적도 있다. 시애틀=이동근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뉴욕 한인사회 40년]가발업 쇠퇴 후 1970년대 청과·수산업 급부상

40년 전인 1970년대 중반은 뉴욕의 한인사회가 급변하는 시대였다. 68년 시행된 새 이민법으로 한인 유입이 늘어나면서 인구 규모가 커졌고 자연스레 한인사회도 팽창했다.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 단체인 '뉴욕한인회'는 1960년도에 창립됐지만 70년대 중반부터 규모와 기능이 확대, 강화됐다. 그리고 83년도에 현재 맨해튼 24스트릿에 있는 지금의 한인회관 건물을 구입했다. 인구 증가와 커뮤니티의 팽창은 한인 경제 규모 확대로 이어졌다. 70년대 초까지 뉴욕 한인들의 주요 사업 종목은 가발이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발행된 '대뉴욕 한인 100년사'에 따르면 65년 맨해튼 브로드웨이 등지에 35개의 가발 수입 및 도매상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발 사업은 75년 이후 쇠퇴기를 맞는다. '뉴욕한인모발조합'이 시장 독점 공급을 시도했다가 반독점 금지법 위반 혐의로 미국 업체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말았다. 때마침 불어닥친 경기 침체와 이 사건을 계기로 가발 사업은 급격히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한인들은 잡화상 등으로 업종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인 상권 형성의 본격화 가발업이 쇠퇴하면서 가발상들이 모여있던 브로드웨이는 각종 도매업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주변에 하나 둘씩 한인 도매업소들이 들어섰다. 이들 도매상들은 한인들이 운영하는 소매 잡화업소와 흑인과 히스패닉 패들러 등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확장해 나갔다. '뉴욕한인경협 10년사'에 따르면 78년도에 브로드웨이 일대에는 잡화, 액세서리, 가방, 모자, 의류, 서비스, 장난감, 안경 등 약 60개 업체가 운영되고 있었고 이 규모가 86년에는 100여 개로 증가했다. 이 시절 뉴욕 한인 경제계의 확대는 업종의 다양화로 이어졌다. 지금 한인 경제계의 중심이 되고 있는 청과업, 드라이클리닝, 수산업, 네일, 델리 등이 7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헀다. 뉴욕의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인 데일리뉴스는 79년 당시 "한인청과상들이 신선한 야채를 먹여주고 있다"고 보도하며 한인 청과업을 조명했다. 매년 추석맞이 행사를 개최하는 청과협회가 74년에 발족했다. 수산업도 청과업과 함께 당시 한인사회의 주요 양대 사업으로 주축을 이뤘다. 78년엔 '뉴욕지구한인어물상인회'가 발족되면서 사업자들의 모임도 정식으로 결성됐다. 출범 당시 30여 명이던 협회 회원 규모는 83년도에 250명으로 증가하며 명칭도 '뉴욕한인수산인협회'로 바꿨다. 수산인협회가 처음 발족한 78년엔 '뉴욕한인드라이클리너스협회'도 창립됐다. 유대인들이 주로 하던 사업인 드라이클리닝은 협회 창립 당시 50개 상점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으나 5년 뒤 700개로 늘고 90년도에는 2000여 개로 급성장했다. 현재는 5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인들의 네일업은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기존 네일업소를 사들이면서 운영하기 시작했고 그 후 자체적인 창업 붐이 일어났다. 네일업은 90년대 들면서 절정을 이뤘으나 90년대 말부터는 중국인 등 타민족의 시장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한인 네일업계를 위협했다. 뉴욕의 한국 식당 뉴욕에 처음으로 문을 연 한국 식당은 62년 유학생 출신의 차정훈씨가 맨해튼 브로드웨이 56스트릿에 차린 '아리랑 하우스'로 '대뉴욕 한인 10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어 67년 맨해튼 매디슨애브뉴와 5애브뉴 사이 40스트릿에 '뉴코리아'가 개업했다. 한국 식당도 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72년엔 '우리하우스(대표 줄리 홍, 7애브뉴, 56스트릿)' '삼복식당(대표 박명규, 43스트릿)' '호심(대표 박정숙, 44스트릿)'이 각각 개업했다. 1년 뒤에는 '인천집(대표 이희호, 30스트릿)'이 문을 열었고 74년엔 '명동식당(대표 심재길, 35스트릿)' '우동하우스(운영자 미상, 27스트릿)' '갈비하우스(대표 최두철, 31스트릿)'가 차례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79년엔 '뉴욕곰탕하우스(대표 김유봉, 32스트릿)'가 열었고 '강서회관(대표 곽현규)'과 '서울하우스(대표 이창현)' 등이 영업을 개시했다. 이들 한국 식당들은 당시 한인들의 사업 활동의 중심지였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인근 지역에 퍼져 있었다. 중화요리 식당은 70년대 말 5애브뉴와 6애브뉴 사이 35스트릿에 문을 연 '홍빈원'이 첫 한인 중화요리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82년에는 '아사원(대표 추명순)'도 문을 열고 홍빈원과 쌍벽을 이룬다. 퀸즈 지역에는 87년 개업한 '취영루(대표 왕준방)'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 플러싱 한인상권의 태동 현재 뉴욕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평가되는 퀸즈 플러싱은 80년대부터 상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메인스트릿과 유니온스트릿 일대에 다양한 한인 업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플러싱은 한인 소매업과 주거지로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절 한인 업소들은 대부분 건물 임대료를 내고 장사를 했기 때문에 건물주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다. 또 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인들이 밀려들면서 메인스트릿은 90년대 후반엔 한인 업소가 급격히 줄었고 유니온스트릿에 있는 유니온상가가 유일한 한인 업소 밀집상가로 남아있다. 이후 한인들은 노던블러바드 상권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인상권은 베이사이드와 리틀넥으로 뻗어갔고, 지금은 노던과 베이사이드가 뉴욕 한인사회의 주요 상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외에도 퀸즈에는 서니사이드에 '대동면옥'이 운영되는 등 80년대에 한인 상권이 형성됐다가 지금은 쇠퇴한 상태다. 또 퀸즈 중부 지역인 잭슨하이츠와 엘름허스트 일대에도 한인 상권이 번성했으나 지금은 일부 업소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인 상권은 브롱스와 브루클린 일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브롱스에서는 포담로드, 킹스브리지와 제롬애브뉴 상가, 170스트릿, 화이트플레인로드, 딕맨스트릿, 헌츠포인트, 보스턴로드, 용커스 메인스트릿 등지에 한인 업소들이 모여들었다. 브루클린에는 풀턴스트릿, 플랫부시애브뉴, 처치애브뉴, 유티카애브뉴 등 흑인 밀집지역에 한인 미용재료 업소들이 주요 한인 사업체로 상권을 이뤘다. 사회봉사 단체의 출현 70년대 들어서면서 한인사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종 봉사단체가 발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60년대까지는 뉴욕의 첫 한인 교회로 알려진 '뉴욕한인교회'가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70년대부터 전문적인 기능을 갖춘 봉사단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뉴욕의 봉사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뉴욕한인봉사센터(KCS)'가 74년 창립했다. 퀸즈한인교회의 부설 기관으로 운영돼던 기구가 한인사회 팽창에 따라 독립적으로 창립됐다. 74년에는 또 뉴욕한국여성회가 발족했고 퀸즈한인천주교회가 한인사회 처음으로 무료 건강검진 행사를 열기도 했다. 76년에는 대뉴욕지구한인상록회가 정식 노인 단체로 출범했다. 85년엔 뉴욕예지원과 한국부인회가 창립됐고 89년에는 뉴욕가정상담소가 발족했다. 80년대와 90년대는 한인사회에 청소년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특히 폭행과 패싸움, 강도와 총격사건 등 사태가 악화되면서 청소년센터가 설립됐다. 당시 청소년센터를 설립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이었던 대니얼 데이비드 당시 전도사였다. 한국어를 했던 데이비드 전도사는 새생명선교회를 창립해 청소년 선도 활동을 벌였고, 이 기관이 나중에 청소년센터가 됐다. 신동찬 기자 shin73@koreadaily.com

2014-09-22

[창간 40주년 - 시카고 한인사회 40년]편리한 교통·값싼 주택값…클락길에 첫 한인상권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를 통해 조선 사절단이 시카고에 머물렀지만 본격적인 한인 이민역사는 이후 50여년이 지난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레디 오(한국명 오종규) 예비역 소령이 노스웨스턴 치대를 졸업하고 벨몬트와 클락길 인근에 자신의 치과 오피스를 연다. 이후 클락과 셰필드길 인근은 한인 상점과 거주지역이 들어섰다. 60년대 들어 미국 이민이 증가했고 본격적인 시카고 한인 이민역사가 시작되며 한인 상권과 밀집지역에도 변화가 생겼다. 시카고 한인 상권과 밀집지역의 변화를 통해 시카고 한인 이민사를 살펴봤다. 클락길에 67년 첫 한인업소 시카고의 한인 상권이 첫 번째로 이뤄진 곳은 클락과 셰필드길 주변 지역이다. 시카고 북부지역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후 로렌스, 포스터, 브린마, 링컨길로 확대됐다. 이전보다 북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클락과 로렌스 인근 지역이 시카고 시내 한인 상권이었다면 본격적인 시카고 서버브 상권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뎀스터와 골프/밀워키다. 시카고 서버브 중에서도 북서쪽으로 진행됐다. 최근에는 이곳으로부터 더 넓게 흩어졌다. 노스브룩과 글렌뷰, 몰튼그로브, 샴버그, 호프만에스테이츠, 버논힐, 먼덜라인, 알링턴하이츠, 마운트프로스펙트, 네이퍼빌 등이 해당된다. 2012년 한인들에 의해 발간된 ‘시카고한인이민사’에 따르면 클락길에 첫 한인업소가 들어선 것은 1967년이다. 당시 대부분의 한인들은 가난한 유학생들이었고 독일 광부들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으로 들어와 시카고에 정착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과 식품점을 원했다. 당시 클락길 입주 한인 업종을 보면 식당과 식품점, 여행사, 보험회사 등이었다. 1970년대 중반 클락길 한인 업소는 60개로 늘어난다. 이렇게 클락길에 많은 한인들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로는 편리한 교통과 값싼 주택값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다운타운으로 연결되는 버스와 지하철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한인들에게 좋았다. 또 렌트 역시 다운타운에 가까운 남쪽보다 저렴해 한인 이민자들이 몰렸다. 현재도 도매업을 중심으로 한인 소유의 업소들이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울 길-한인타운 표지판도 클락길에서 번성한 한인업소는 1970년대 중반 들어 그보다 더 북서쪽에 위치한 로렌스길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로렌스 인근은 시카고에서도 다민족문화가 풍부한 알바니팍 커뮤니티의 중심지다. 지금도 라틴, 인도, 중동계 주민들이 섞여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만 5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전까지 한인들이 몰려 있던 클락길이 다운타운으로 통하는 대중교통은 편리하지만 94번 고속도로와는 떨어져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당시부터 한인들이 자가용을 소유하면서 고속도로 이용이 빈번하게 된 것도 로렌스 지역으로의 이전을 촉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시 북쪽과 외곽으로 이주하면서 한인들에겐 기회가 됐다. 당시 기록을 보면 유태인들이 판 상가를 한인들이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곧 한인 상권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로렌스길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90번 고속도로 진입로, 동쪽으로는 켓지길까지 한글로 된 간판이 곳곳에 들어서기도 했다. 또 로렌스길 일부가 서울 드라이브로 명명되기도 했으며 고속도로 로렌스길 출입로에 코리아타운이라는 표지판이 들어서기도 했다. 1980년대 초 로렌스길 인근에는 270여개의 한인 업소가 존재했는데 오랫동안 코리아타운으로 불렸다. 상권은 밀워키·골프길에 집중 1990년대 이후 이민자들은 비교적 많은 자금을 확보한 채 이민을 왔다. 기존 이민자들 역시 그간의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다 좋은 환경을 찾아 시카고 외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글렌뷰와 노스브룩은 훌륭한 학군과 거주조건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두 지역이 대표적인 한인 밀집지역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상권은 나일스의 밀워키와 골프길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나일스의 수퍼H마트와 아씨플라자가 그 중심에 있다. 이전에는 아시아수퍼, 하나수퍼 등도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BBCN으로 이름이 바뀐 포스터은행 역시 골프와 밀워키에 지점이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옥튼길, 북쪽으로는 던디길, 동쪽으로는 94번 고속도로, 서쪽으로는 294번 고속도로까지 한인 업소가 밀집돼 있다. 골프와 밀워키가 한인 업소 최대 밀집지라면 샴버그와 호프만에스테이츠는 서쪽 중심지다. 기존 한인 밀집지역이 94번 고속도로를 타고 시카고 북쪽으로 뻗어갔다면 샴버그 등은 9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닿는다. 이 지역 역시 아시안이 밀집한 곳으로 우드필드쇼핑센터를 중심으로 상업시설도 모여 있다. 인근의 마운트프로스펙트, 알링턴하이츠, 팰러타인, 인버니스, 배링턴 등지에도 한인들이 많다. 시카고 서쪽 서버브인 네이퍼빌과 라일, 위튼 지역에도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아리곤국립연구소와 페르미연구소 등이 있어 고학력, 전문직 종사 한인들이 많은 특징이 있다. 중앙일보 사옥도 한인상권 따라 이전 시카고 중앙일보의 역사도 한인상권의 변화와 함께 했다. 중앙일보 본사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은 어빙팍과 엘스톤길이 교차하는 곳의 단독건물이었다. 당시는 클락길 인근에 한인 업소가 많았고 로렌스쪽으로 서서히 이주가 진행중인 시기였다. 중앙일보 사옥의 두 번째 위치는 켓지와 윌슨길 인근이었다. 인근 로렌스길에 한인 업소들이 들어섰던 곳에서 가까웠다. 2000년대부터는 오헤어공항 인근의 엘크그로브로 이주했다. 엘크그로브는 골프와 밀워키길 한인밀집상권과 가깝고 시카고 북서부 서버브지역의 중심권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근 샴버그와 호프만에스테이츠, 마운트프로스펙트, 알링턴하이츠, 팰러타인 등의 한인 밀집 지역과도 접근성이 좋다. 박춘호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워싱턴 한인사회 40년]미주 정치력 신장의 선봉…‘동해병기법’ 통과시켜

워싱턴·볼티모어 한인사회는 지난 40년간 급성장하면서 미주 한인 정치력 신장의 상징이 됐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메트로폴리탄에 있다는 특성 때문에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한인사회의 역사는 정치력 신장의 역사와 맥을 함께하고 있다. 워싱턴·볼티모어 한인사회의 또 다른 특성으로는 미주동포 사회의 인권과 교육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문별로 지난 40년간 한인사회의 역사를 정리했다. 한인, LA·뉴욕 이어 세 번째 워싱턴·볼티모어 한인사회가 지난 40년간 겪어온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인사회의 급격한 팽창이다. 센서스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80년 워싱턴 일원의 한인인구는 버지니아 1만2600명, 메릴랜드 1만5100명, 워싱턴DC 300명 등 2만8000명 수준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2만 명 정도의 한인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인구는 이후 이민자와 유학생의 수가 늘어나면서 2000년에는 8만5000여 명, 2010년에는 12만1441명으로 증가했다. 버지니아의 경우 10년 만에 55.9%(2만5298명), 메릴랜드는 24.1%(9437명)나 급증했다. 2014년 워싱턴·볼티모어 일원의 한인인구는 단기체류자나 서류미비자 등을 포함하면 25만~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미주 한인사회 규모로 LA와 뉴욕에 이어 세 번째로 성장한 배경에는 워싱턴DC 일원의 지역경제가 타지역에 비해 튼튼해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워싱턴 지역은 2007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미국경제가 전국적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지역에 속한다. 연방정부와 관련한 조달사업이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어 한인들이 연방정부와 로컬 정부, 조달사업, 정보통신 관련 업체에 취업하거나 소기업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인 대형마켓 타인종 공략 한인 인구가 늘어난 만큼이나 한인 경제규모도 크게 성장했다. 1982년 한국학생회가 발행한 한인주소록에는 공공기관 및 한인단체가 120개, 한인업소는 38개 업종에 181개 업체가 기록됐다. 이같은 한인업체의 수는 이후 2000년 1400개 정도로 증가한 뒤 2010년에는 3500여 개로 급증했다. 애난데일의 경우 한인사회 상권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또 한국과 워싱턴을 잇는 대한항공의 경우 주 3회 운항하던 횟수가 주 7회 매일 운항으로 늘었고 한국과의 경제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리브라더스와 롯데마트, H마트, 지구촌마켓 등 한인 대형마켓도 급증했다. 한인마켓은 한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안과 러시아, 동유럽 이민자들을 주고객으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워싱턴 일원에는 한인 등 아시안과 동유럽 이민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한인마켓이 이같은 신흥시장을 공략, 성공하고 있다. 주류사회의 대형마켓인 세이프웨이와 자이언트 등이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는 곳에 한인마켓이 입점해 쇼핑몰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많다.   마크 김 등 선출직 한인 활약 워싱턴·볼티모어 한인사회의 정치력도 지난 40년간 크게 신장됐다. 마크 김이 지난 2009년 버지니아 주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내리 3선에 성공해 중견정치인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인여성 선출직으로는 사상 처음 헌든 시의원에 당선된 그레이스 한 울프도 올해 3선에 성공해 주목을 받고 있다. 문일룡 변호사도 미국 공교육 중심지인 페어팩스 카운티의 교육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워싱턴 한인사회의 정치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7월1일 발효된 ‘동해 병기법’을 들 수 있다. 주 의회가 법률을 제정해 주내 공립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나 지도 등 교재에 일본해와 함께 동해를 병기하도록 못박은 것은 버지니아가 최초다. 동해병기법의 제정은 지난 2012년 버지니아 주 상원에 처음으로 동해 법안이 상정된 지 2년여 만에 이룬 쾌거일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이민 역사 111년 만에 처음이다. 이 법은 한인단체들을 중심으로 동포사회가 풀뿌리 운동으로 주 의원들을 움직여 법안을 상정한 뒤 우여곡절 끝에 테리 매컬리프 주지사의 서명까지 받아냈다. 이에 따라 버지니아주에서는 한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타인종 학생들도 수업 시간에 ‘동해(East Sea)’라는 이름을 배우게 됐다. 미국 50개 주 중 동해 병기법이 만들어진 곳은 한 주에 불과하지만 전국적인 파급 효과를 내고 있다. 버지니아주에 교과서를 공급되는 교과서는 다른 수십 개 주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버지니아 법으로 동행병기 내용이 포함돼 다른 주의 교과서도 자연스럽게 개정되기 때문이다. 한인 여성인권·장학재단 효시 워싱턴에서는 여성 인권 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주 여성인권 운동의 효시인 한미여성재단이 발족한 곳이 버지니아다. 한미여성재단은 지난 1963년 7월 국제결혼한 한인여성 6명이 창립했다. 당시 한미부인회로 발족했지만 1984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한 뒤 가정폭력 피해여성 돕기와 쉘터 운영, 한국과 미국의 혼혈 학생 장학금 지급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2년 창립된 워싱턴여성회도 여성인권과 사회봉사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하고 있다. 초기에는 회원자격을 국제결혼한 여성으로 국한했지만 이후 일반 한인여성들에게도 문호를 개방, 활동영역을 확장했다. 워싱턴여성회는 장학사업과 스미소니언 한국유산보존기금 모금운동 등 문화사업을 벌이고 있다. 1970년 이전에 미국에 유학온 학생들은 대부분 고학생이었다. 조지타운대와 조지워싱턴대, 아메리칸대 등이 유명대학이 몰려있는 워싱턴 지역에도 1950년대부터 한인유학생들이 유학왔다. 한인학생들을 돕기 위해 정성이 모여 발족한 단체가 한미장학재단. 1969년 2월 미국에서 한인 최초의 장학재단으로 설립된 이 단체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1985년 LA에서 수부지역장학회, 1991년 애틀랜타에서 남부지역장학회, 1992년 시카고에서 중서부장학회에 이어 뉴욕의 동북부장학회 등 지역장학회를 조직,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한미장학재단은 초기에는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이후 동포 자녀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뿌리교육 한국학교 활성화 워싱턴 지역에서는 1970년 6월 주미대사관이 후원한 워싱턴 한글학교가 최초의 한글학교로 개교했다. 이후 1.5세대와 2세대에 대한 한글과 한국문화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인교회 등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국학교가 잇따라 설립됐다. 2014년 현재 50여개 한국학교가 한인학생뿐만 아니라 일부 타인종 학생도 가르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2003년 메릴랜드대 한국학 프로그램 살리기 운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당시 주정부 예산삭감으로 한국학 프로그램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한인단체를 중심으로 모금운동이 벌여 3만 달러를 대학측에 전달, 한국학을 살리기도 했다. 박성균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LA 영사관 40년] '큰 한인사회'<대한민국 영토 10배 관할> 지원하는 '작은 한국정부'

LA는 대한민국 외교사의 실질적인 시작이고 여전히 그 중심에 있다. 한국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그해 11월 LA에 재외공관으로는 처음으로 총영사관을 설치했다. 이는 워싱턴DC에 있는 주미대사관보다도 4개월이나 빠른 시작이었다. 당시 LA총영사관은 외교공관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지금도 대사급 인사가 총영사로 부임하고 지난 85년 전두환 전 대통령 이후 한국 정상의 방문이 줄곧 이뤄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개관 66년의 공관 변천사 시작은 초라했다. 다운타운 542 사우스 브로드웨이의 아케디아 빌딩 4층에 세든 총영사관은 말만 공관일 뿐 방 2개짜리 오퍼상 수준이었다. 광복 후 피폐한 조국의 현실은 아직 번듯한 외교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아픔은 한국전쟁 발발로 더욱 깊어졌다. 서너 명의 직원만으로 공관 명맥만 유지하던 총영사관은 1957년 윌셔와 코크란 코너에 있는 20층짜리 건물의 11층으로 이전한다. 지금도 LA한국문화원 인근에 있는 이 건물은 팔래비 정권의 압제를 피해 도망 나온 이란 사람이 소유한 것이었다. 총영사관이 공관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현재의 윌셔길 버몬트와 뉴햄프셔 사이에 있는 5층 청사로 이전하면서부터다. 한국 정부는 1988년 3월 주차장 부지를 포함한 건물을 500만 달러에 매입, 그해 10월 청사 이전을 완료했다. 이전 당시만 해도 1, 2층엔 가주외환은행(현 한미은행)이 있어, 출입문을 별도 사용하다가 2003년부터 공관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지은 지 60년 가까운 건물이라 재건축 필요성이 대두됐고, 2012년 기획재정부 해외재산관리팀이 실사 끝에 재건축 결정을 한 바 있다. 건축비용이 3000만 달러로 추산될 만큼 큰 공사라 예산확보가 미뤄지고 있지만 2~3년 내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동안 LA총영사관을 거쳐간 총영사만 19명이고 현 김현명 총영사가 20대째다. LA총영사 중 3대(1968~1972년) 노신영 총영사는 이후 국무총리까지 올라 가장 출세한 케이스로 꼽힌다. 획기적인 인물은 18대(2008-2011년) 김재수 총영사일 것이다. 김 총영사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시절 BBK사건을 변호한 인연으로 해외동포로는 첫 공관장에 올랐다. ▶영사 및 행정직 규모 증강 2014년 9월 현재 LA총영사관에는 총영사를 포함한 영사 21명과 행정직원 29명 등 총 50명이 다양한 공공외교 및 민원서비스를 하고 있다. 초대(1948-1960년) 민희식 총영사 시절 외교부 직원 서너 명으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배 이상 커진 규모다. LA중앙일보가 창간한 1974년 당시에도 영사관 직원은 행정직까지 더해도 10명 수준이었다. 영사 파견이 크게 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이민이 본격화한 1970년대 이후부터다. 이민자 증가와 국력 신장 등으로 영사업무도 정무, 홍보, 검찰, 지자체, 법무, 관세 등으로 세분화하기 시작했다. 1980년 문화원, 2000년 교육원이 설치돼 총영사 지휘를 받게 된 것도 영사관 직원 수를 늘린 이유가 됐다. 부총영사 직제는 1980년 동포사회가 커지면서 업무를 전담할 외교부 내 중량급 인사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신설됐다. 국세영사, 홍보영사 자리가 폐지되기도 했지만 한미FTA 시행으로 2012년 관세영사 직이 부활했고, 2012년엔 개방형 공모제를 통한 부총영사가 처음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1990년 대 들며 부총영사가 2명으로 는 것은 영사관 내 별똥부대처럼 움직이는 국가정보원 담당 때문이다. 한편, 지난 2007년부터는 총영사관의 행정직원도 한국 채용의 원칙에서 현지채용으로 전환, 공관의 현지화를 통한 열린 공관을 지향하게 된다. ▶민원 업무 확대와 규모 확장 여권·비자 발급· 영사확인 등 기본적인 민원업무는 총영사관 초창기와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서비스 개선, 업무 전산화 등으로 업무는 더욱 세분화하고 늘어나고 있다. 여권업무도 2008년부터 전자여권제가 도입되면서 신속··간편·정확한 발급으로 민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12년부터는 가족관계증명서 발급이 시작돼 민원 편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동안은 한국의 친척이나 지인에게 의존하거나 영사관 접수시 수령까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으나 영사관에서 발급하게 되면서 일주일 내로 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 초부터 시행한 공인인증서 발급이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주민등록증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아이핀/마이핀 업무는 공관 개관 초창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외교 능력을 발휘해 불법체류 한인을 위한 신분증명서인 영사관ID를 발급하기 시작한 것은 LA총영사관이 이룬 쾌거다. 17대(2006-2008년) 최병효 총영사 시절인 2006년 총영사관은 LA시 및 카운티의 협조로 신분증명과 학교 등록, 은행계좌 개설에 사용할 수 있는 영사관ID 발급을 인정을 받았고, 타주 공관으로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찾아가는 민원서비스도 확대됐다. LA총영사관은 남가주를 비롯해 애리조나, 네다바, 뉴멕시코주를 관할지역으로 하는 만큼 원거리 거주자들은 영사관 방문을 위해 큰 맘 먹고 휴가까지 내야만 했다. 하지만, 9대(1985-1989년) 김기수 총영사 시절부터 오렌지카운티 순회영사를 시작한 후로 원거리까지 실시 지역과 횟수 등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오렌지카운티와 샌디에이고는 현재 주 1회까지 실시하고 있다. 한인들과의 소통을 늘리기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 외에 2011년부터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김문호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한인은행 40년]한인사회 급성장 가능케한 든든한 견인차

본점 수 '제로(0)'에서 20개, 9월 현재 총 자산고 225억여 달러. 전국 각지의 한인은행들이 지난 40년 동안 이룬 눈부신 성취다. 지금이야 한인은행이 워낙 많아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민 초기 한인 사업주들에게 한인은행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었다. 타인종 은행의 높은 문턱에 좌절을 맛봐야 했던 당시 한인들에게 한인은행의 존재는 비즈니스를 여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금 확보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한인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한인은행들의 발전사를 가주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한국계·한인은행 설립 1974년 9월 19일 LA 윌셔가에 가주외환은행(California Korea Exchange Bank)이 문을 열었다. 가주는 물론 미국 최초의 한국계 은행이 설립되는 순간이었다. 가주외환은행은 한국 외환은행이 단독출자해 세웠다. 초기 자본금은 300만 달러였다. 한국 외환은행 전무를 지낸 고 정원훈씨가 초대 행장을 맡았다. 가주외환은행은 2년 후 500만 달러 증자를 하면서 명칭을 CKB(California Korea Bank)로 바꿨다. CKB는 이후 퍼시픽유니온뱅크(PUB)로 개명했으며, 창립 30주년을 맞은 2004년 한미은행에 합병됐다. 1980년 12월엔 유대계와 한인 자본으로 설립된 윌셔스테이트 은행(현 윌셔은행)이 문을 연다. 타인종 이사 11명과 한인 4명이 400만 달러의 자본금을 모아 설립한 이 은행은 토착 한인자본이 투입돼 설립된 최초의 한인은행이다. 2년 뒤인 1982년 12월, 한미은행이 3737 올림픽 불러바드에서 영업을 개시한다. 순수 토착 한인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한인은행이 문을 연 것이다. 가주 한인은행의 역사는 곧 한인경제 발전사이기도 하다. 당시는 올림픽가를 따라 한인업소가 늘어나면서 LA한인타운을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비즈니스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 확보다. 어깨가 축 처진 채 타인종 은행의 문을 나섰던 당시 한인들에게 한인은행은 복음 그 자체였다. ◆성장기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가주에선 한인은행 설립이 잇따랐다. 주무대는 역시 LA였다. 중앙은행이 1986년에 설립됐고 3년 뒤인 1989년엔 나라은행이, 1991년엔 새한은행이 각각 문을 열었다. 한인은행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한인타운 경제규모의 확장이 성장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98년 1월 29일, 한인은행권엔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나라은행이 나스닥 시장에 한인은행으로선 처음으로 상장된 것이다. 같은 해, 윌셔은행이 나라의 뒤를 이어 나스닥에 상장했다. 이어 2001년 1월 한미, 2002년 10월 중앙은행이 역시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나스닥에 상장된 4개 은행은 '빅4'를 형성하며 한인은행권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당시 형성된 '빅4'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윌셔, 한미와 함께 '빅3' 상장은행에 속하는 BBCN이 2011년 나라와 중앙의 합병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접어든 이후, 한인은행가엔 활력이 넘쳤다. 새로운 은행이 속속 등장한 것이다. 2001년엔 오렌지카운티 부에나파크에 유니티 은행이 설립됐다. 이듬해인 2002년엔 미래은행이 LA에 등장했다. 2003년엔 태평양은행이 탄생했다. 2년 뒤인 2005년엔 문자 그대로 한인은행 탄생 러시가 일었다. 3월에 커먼웰스비즈니스뱅크(현 cbb뱅크), 6월엔 퍼스트스탠다드뱅크(First Standard Bank, FS제일은행)가 각각 문을 연 것이다. 이 은행은 2010년에 오픈뱅크로 이름을 바꿨다. 한달 뒤인 7월엔 한인 투자자들이 오클랜드의 '뱅크오브오클랜드'를 인수, '아이비은행'으로 개명했다. 2006년엔 오렌지카운티 가든그로브에 US메트로뱅크가 들어섰다. 2009년에 가주에 본점을 둔 한인은행의 수는 한미, 나라, 윌셔, 중앙, 새한, 태평양, 미래, 커먼웰스비즈니스, 아이비, 유니티, FS제일, US메트로 등 12개에 달하게 됐다. ◆시련기 성장일로를 달리던 한인은행가는 2008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된다. 경제위기로 인한 수익성 악화에 부동산 버블붕괴로 인한 대출 부실화, 무리한 성장 드라이브에 취해 기준도 무시한 채 내줬던 대출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탓에 많은 은행들이 위기를 맞았다. 다수의 은행들은 금융감독 당국의 제재를 받고 연방정부 지원금(TARP)에 의존해 위기 타개에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와중에 폐쇄되는 은행도 생겼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2009년 6월 26일 부실경영을 이유로 미래은행 본점과 4개 지점을 폐쇄했다. 한인은행으로서는 최초로 폐쇄 조치를 당한 것이다. 미래은행은 윌셔로 매각됐다. FDIC는 2010년엔 아이비 은행에 폐쇄조치를 내렸다. 두 은행 주주들은 보유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재도약기 경기침체의 그늘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한인은행들은 재도약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인수·합병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나라와 중앙의 합병으로 BBCN이 탄생했다. 새한은 윌셔와 합쳤다. FS제일은행은 이미지를 쇄신하고 좀 더 친숙한 이름을 갖기 위해 오픈뱅크로 개명했다. 현재 한인은행들은 강화된 대출 기준 등 관련 규정을 충실히 따르면서 SBA론을 포함한 대출 확대와 인수·합병 등을 통해 다시금 성장가도를 걷고 있다. 2008년 27개에 달했던 전국 한인은행의 수는 올해 9월 현재 20개로 감소했다. 하지만 6년 전에 비해 한인은행들의 내실이 다져진 것은 확실하다. '빅3 은행'이 인수·합병을 통해 자산 규모를 크게 늘려 커뮤니티 뱅크를 벗어나 전국을 무대로 영업하는 은행으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한 것도 큰 수확이다. 9월 현재 미국 내 한인은행으로는 가주의 BBCN·한미·윌셔·태평양·cbb·오픈·유니티·US메트로, 뉴욕·뉴저지 일대의 우리아메리카·신한아메리카·BNB하나·뉴뱅크·뉴밀레니엄뱅크·노아(Royal Asian), 모아은행(행장 폴 현)을 한인 디비전으로 운영하고 있는 뱅크오브프린스턴, 시애틀의 유니, 애틀랜타의 제일·메트로시티·노아(Noa), 하와이의 오하나 등이 있다. 임상환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LA한인 자바 40년]자바가 살아야 한인들이 산다

20년전 샌페드로 홀세일 마트 들어서며 지각 변동 최근 마약 돈세탁 수사 등 악재…탈출구 찾기 골몰 LA 한인사회를 논할 때 다운타운 자바시장을 빼놓을 수는 없다. 자바시장 앞에는 늘 'LA 한인타운 경제의 젖줄', '한인 사회 경제의 시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왔다. 그만큼 자바시장은 한인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요 몇 년 새 극심한 불경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자바시장은 여전히 한인사회 경제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자바가 살아야 한인사회 경제도 산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다. 중앙일보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봉제, 원단, 의류도매업(매뉴팩처) 등을 일컫는 자바시장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자바 형성 전 봉제공장 1960, 70년대 다운타운 봉제업체들은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피코와 5가, 힐과 메인 사이에는 봉제업체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당시에는 미국 내 생산이 주를 이뤘고 단가도 몇십년이 지난 지금보다 높았다는 것이 봉제업계 관계짜들의 말이다. 그때 당시 봉제공장을 운영했던 한 한인 업주는 "기계 50대 정도 돌리면 한 달에 1~2만 달러를 벌었다고 보면 된다"며 "현재 간단한 블라우스 하나에 70센트 받는다면 그때는 2~3달러였다"고 회상했다. ◇자바의 원조는 샌티 앨리 우리가 알고 있는 자바는 '자버(Jobber)'의 잘못된 발음이다. 자버는 과거 영국 증권거래소의 중개인을 일컫던 말이다. 미국에서는 일용직 일꾼(odd-jobber)이나 중간도매상(rack-jobber)의 의미로 쓰인다. 초창기 자바에 몸담았던 한인들은 자바를 제품을 직접 만드는 매뉴팩처와 제품을 소매에 파는 도매의 중간 단계라 설명한다. 다시 말해, 도매를 주로 하면서 때때로 제품도 만드는 것이다. 자바의 역사는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바 한인 원로들에 따르면 올림픽과 12가, 샌티와 메이플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매뉴팩처에서 팔다 남은 옷을 가져다 도매 형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자바의 유래다. 당시 이 지역을 샌티 앨리라 불렀다. 1978년, 유대계 판인 샌티 앨리에 한인들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35년 자바시장에 몸을 담은 한 한인 업주는 "처음에는 3명 정도가 이 앨리에서 옷을 팔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로즈미드나 파라마운트의 스왑밋 그리고 텍사스주 엘파소 등 국경 스왑밋 등 업주들이 이곳에 와 옷을 구매해 갔다"고 설명했다. 이후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 고객들이 대거 샌티 앨리를 찾아 오면서 시장의 규모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샌페드로 홀세일 마트 20년 전 11가와 샌페드로 인근 샌페드로 홀세일 마트(1100 S. San Pedro St.)가 들어서면서 자바시장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자바시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샌티 앨리 지역의 렌트비는 점점 비싸지고 유대계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들이 샌페드로 길을 중심으로 새 활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 의류도매업체들이 대거 생겨나 전성기를 달렸다. 현재 샌페드로 홀세일 마트는 다운타운 자바시장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트에만 308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연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유명 의류소매업체인 포에버 21도 이 마트에서 성공 기반을 닦았었다. 또, 이 마트 오픈 이후 한인 업주들끼리 힘을 모아 인근 지역 빌딩들을 매입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자바시장에만 한인 소유 빌딩이 20개가 넘는다. 한 자바시장 관계자는 "엄연히 말하면 이제는 자바라고 부르면 안 된다. 지금은 모두 옷을 만드는 매뉴팩처이기 때문"이라며 "샌페드로 홀세일 마트 오픈을 통해 자바시장에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위기의 자바… 이겨내자 2014년 현재. 자바시장은 힘겹다. 불경기가 이어지고 있고 여기저기 악재가 겹친다. 지난 10일에는 연방수사요원 1000여명이 투입된 자바시장 최대 규모의 급습이 이뤄졌다. 연방 수사당국은 20여 대형 한인 의류도매업체를 대상으로 한 멕시코 마약 조직 관련 돈세탁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인 의류협회 측은 "자바시장이 범죄의 온상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밝힌 뒤 이미지 개선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다. 의류도매업체들은 끊임없는 가격 낮추기 경쟁에 진이 빠지고 원단업체들은 결제를 늦추거나 아예 결제 없이 문을 닫는 불량고객들과 무차별 디자인 도용 업체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봉제업체들은 노동력 부족으로 사람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분명 희망은 있다. 매뉴팩처 업체들은 시대 흐름에 맞춰 온라인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의사소통에 문제없는 2세들을 내세워 주류시장 공략에도 앞장서고 있다 샌페드로 패션마트 협회 돈 이 회장은 "20~30대 젊은 2세들의 자바시장 유입이 늘면서 주류 시장 진출 등 시장 확대가 이뤄지고 있다"며 "체감경기는 나쁘지만, 2세들을 내세운 자바시장의 미래는 밝다"고 설명했다. 거래 업체 확대도 또 다른 묘안이다. 소규모 부티크 업체를 확보해야 한다. 한 업주는 "부티크 업체는 위험부담이 적다. 몇몇 업체가 수금이 되지 않아도 심각한 타격은 없다"며 "하지만,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봉제, 의류도매업에 이어 1980년대 가장 늦게 형성된 원단업계는 요즘 '뭉치면 산다'를 실천하고 있다. 업체들끼리 불량고객 정보를 공유해 블랙리스트를 제작한다. 30일 이상 결제를 미룬 업체, 60일 이상 결제를 미룬 업체, 바운스 체크를 발행한 업체, 소송중인 업체 등 항목도 다양하다. 이 리스트에 오른 업체들과는 최대한 거래를 자제한다. 원단 샘플 도용 방지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디자인 도용을 하는 업체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는 것이다. 봉제업체들은 매뉴팩처 업체들과 적정 단가를 책정하는 문화 정착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적정 단가를 맺게 되면 오버타임 미지급 및 최저임금 등의 노동법 위반 사례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우 기자

2014-09-22

[창간 40주년 - 미주 한인사회 40년]미주 중앙일보 40년

미주중앙일보의 40년은 도전의 기록 그 자체다. 출발이 늦었지만, 변화와 혁신을 주도해왔다. 안내광고란, 부동산 등 섹션 신문 발행, 한글제호, 가로쓰기, 인터넷 뉴스서비스, 베를리너판 도입 등은 재외 한인 언론 사상 최초의 혁신적인 시도들이다. 1974년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 이어 한국의 중앙지로서는 3번째 LA지사를 설립했다.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1116 W. Olympic Blvd.)에 첫 사무실을 열었다. 창간호는 1974년 11월18일 본국지와 미주판을 합쳐 8면으로 발행됐다. 초대 편집국장은 이선주씨였고, 한국 본사에서 김건진 특파원(1999~2000 LA지사장 역임)이 파견됐다. 이듬해 7월엔 뉴욕 지사가 설립됐다. 뉴욕의 창간호는 미주판 4개면, 본국지, 광고 등을 합해 18면이었다. LA지사는 76년 윌셔와 버링턴 애비뉴(661 S. Burlington Ave), 82년 올림픽 불러바드와 후버 스트리트 인근(2380 W. Olympic Blvd.) 자체 사옥, 88년 현재의 사옥(690 Wilshire Pl)으로 3차례 이전하면서 그 역량을 차근차근 쌓았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이민사회에 컬러 신문의 시대를 열었다. 79년 시카고 지사를 설립하면서 LA와 뉴욕을 이은 한인 최다 거주지인 3개 대도시간 중앙일보 네트워크를 갖췄고, 85년 샌프란시스코 지사, 2001년 워싱턴 DC 지사, 2007년 애틀랜타 지사를 각각 세웠다. 그동안 혁신은 계속됐다. 77년에는 한인 언론 최초로 안내 광고란을 신설했다. 광고주들은 직원 모집, 아파트 렌트, 업소 매매 등을 저렴한 비용으로 실을 수 있어 좋았고, 소비자들은 필요한 정보를 한곳에서 볼 수 있어 편리했다. 90년에는 한인 언론 최초로 부동산 별도 섹션을 발행했고 96년에 또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2004년 자매지인 일간 스포츠 USA를 창간했다. 2009년에는 베를리너 판형을 도입해, 언론의 틀을 바꿨다. 기존 신문의 약 72% 크기인 베를리너판은 사람 팔 길이와 눈 구조 등 인체공학적 측면에서 가장 편안한 신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4년 현재 미주중앙일보는 미주본사를 비롯해 LA,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애틀랜타 등 6개 직영 지사와 8개의 프랜차이즈사까지 한인 언론 최대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2014-09-22

[창간 40주년 - 미주 한인사회 40년]2000’s, 최악의 테러, 이민 100주년…조기유학 봇물

미주 한인사회의 ‘밀레니엄 키워드’는 9·11 테러, 이민 100주년, 떡, 월드컵, 조기 유학으로 요약된다. 2001년 9월11일. 라디오에서 기자가 울부짖으며 외쳤다. “아, 건물이 무너집니다, 무너집니다.” 사상 최악의 동시다발적 테러였다. 뉴욕 현지 시간으로 오전 9시를 전후해 110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로 2대의 항공기가 충돌했다. 미국의 상징이 완전히 붕괴되는 처참한 광경을 전세계는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비명과 절규, 통곡이 생중계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알카에다 테러범 19명의 자폭행위로 한인 21명을 포함해 2977명이 숨지고 6500여명이 다쳤다. 경제적 피해는 직접적인 금액만 522억달러에 달했다.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5000여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1년 5월에 사살됐다. 그해 11월8일 한인사회는 성금 127만달러를 모금해 희생자 지원금으로 적십자사에 전달했다. 침울한 한인 사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건 이듬해 6월 ‘월드컵 4강 신화’였다. 새벽을 깨운 승전보가 계속됐다. 6월29일에는 한인 2만여 명 스테이플 센터에서 최초·최대 규모의 응원전을 벌였다. 2003년 1월13일 한인사회에 이정표가 세워졌다.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주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일당 69센트중 20센트를 독립운동에 지원했다. 13일엔 하와이에서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 퍼레이드가 열렸다. 보름전인 전년도 12월31일에는 LA윌셔그랜드호텔에서 리셉션이, 새해 첫날엔 로즈퍼레이드 꽃차 출전 등 각종 행사가 이어졌다. 이민의 이정표가 세워진 2000년대, 새로운 형태의 이주가 봇물을 이뤘다. 조기 유학이다. 한국 교육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조기 유학생은 2000년 4397명에서 매년 크게 늘어나 2006년에 2만9511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기러기 가족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고, 조기 유학생들이 자리잡은 어바인, 풀러턴 등 오렌지카운티 주요도시들은 ‘남가주의 강남 학군’으로 불리며 급성장했다. 한인사회내 논란이 되어온 ‘떡’문제는 2001년 그레이 데이비스 가주 주지사가 상온보관과 판매 허용법안에 서명하면서 해결됐다. 2000년대는 개스비 폭등의 시대기도 하다. 본지 2002년 1월15일자 1면 사진에 게재된 타운내 주유소 개스비는 1.11달러였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3배가 넘는다. 개스비 부담으로 하이브리드 차량과 전기차 보급이 확산됐다. 그외 사건으로는 2000년 7월7일 로비스트 린다 김이 한국에서 구속됐으며 그해 12월11일 뉴욕 WB11 TV가 한인 개고기 식용 왜곡 방송을 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버지니아테크에서 한인 조승희가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켜 32명이 목숨을 잃고 29명이 다쳤다. 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을 한인이 일으켰다는 소식에 한인사회는 ‘2차 폭동’ 혹은 ‘혐오범죄’ 대상 가능성이 숨을 죽여야 했다.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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